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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환자들의 '손발' 31년… 스페인서 온 유의배 신부

새벽아잘살자 2011. 2. 8. 10:46

설 사흘 전인 1월 31일 오후 경남 산청군 산청읍 성심원의 한센인 전문요양원 2층 병동에서

파란 눈의 유의배(65) 신부가 한센병 환자 황봉출(81)씨에게 세배를 했다.

"어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한센병으로 손가락이 다 떨어져 나간 황씨는 뭉툭한 손으로 유 신부 손을 잡으며

"고맙소, 신부님. 그런데 세뱃돈 줄 게 없어서 어쩌지…"라고 말했다. 유 신부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300살까지 사시면 돼요"라고 말하며 황씨의 볼을 비볐다.

↑ [조선일보]지난달 31일 오후 경남 산청군 한센병환자 수용시설 성심원에서 스페인 출신 유의배 신부가 환자 김옥빈씨에게 세배하고 있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성심원은 지난 시절 '나병'이나 '문둥병'으로 불리던 한센병 환자와 가족 200여명이 사는 한센인 수용시설이다.

3일 설날에는 전국에서 찾아온 한센병 환자 가족 20여 명이 성심원을 찾아 유 신부에게 세배했다.

"큰 병을 앓는 우리 피붙이들을 가족처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인 유 신부는 스페인 사람으로 본명이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이다.

유 신부는 1976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어릴 적 라디오에서 6·25전쟁 이야기를 들었지요.

내 고향 게르니카도 1937년 독일 나치군의 공습을 받았기 때문에 전쟁의 아픔을 겪은 한국이

남의 나라 같지가 않았습니다."

유 신부는 한국말을 배우면서 성(姓)인 우리베의 음을 따 한국 이름을 유의배라고 지었다.

유 신부는 선배 선교사로부터 "일손이 부족하니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성심원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진주 ·주문진· 제주 의 성당을 거쳐 1980년 성심원 담당 신부로 정식 부임했다.

그 후 31년 동안 매일 아침 미사가 끝나면 한센인들을 찾았다. 누구든 만날 때마다 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한센병으로 눈과 귀가 먼 박순엽(85)씨는 "안 보이고 안 들려도 신부님이 옆에 오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은 신부님뿐"이라고 했다.

당시 성심원은 한센병 환자 200여 명이 초가집과 슬레이트집 100여 채에 흩어져 사는 '환자촌'이었다.

병 때문에 가족과 일자리를 잃고 세상의 눈을 피해 지리산 자락으로 숨어든 사람들이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들은 눈이 멀고 귀가 먹었고, 코·입술·팔다리가 짓물렀다.

유 신부는 "남들은 흉측한 환자라고 했지만, 이들의 눈빛은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고 했다.

거동이 불편한 한센인들에게 유 신부는 손발이나 다름없었다. 환자들이 외부인들의 시선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을 꺼리자 1980년대 중반 운전면허를 따서 이들의 '운전기사'가 됐다.

환자 통원치료는 물론 환자촌 아이들 등·하교와 마을 심부름까지 도맡았다.

그동안 유 신부가 임종(臨終)을 한 환자만 5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혼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1996년부터는 한센인 사망자의 염(殮)도 하고 있다.

궂은 일을 맡아 하던 마을 촌로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자 어깨너머 배운 솜씨로 염을 했다고 한다.

성심원 사무장 송승정(61)씨는 "신부님은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힐 때마다 '그동안 많이 아팠지?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해. 좋은 데 갈 거야'라고 말씀하신다"고 전했다.

유 신부는 "한국 사람들의 따뜻한 정이 좋아 지금껏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며

"5년 전에는 성심원 가족들이 내 회갑 잔치를 열어줬다"고 자랑했다.

"내 부모, 내 자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칠순, 팔순 치르며 가족과 꼭 껴안고 살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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