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민기자 리포트]농아인 야구 선수들의 중단 없는 도전

새벽아잘살자 2012. 5. 8. 09:50

 
어느새 딱딱한 바닥에서 날린 흙먼지가 벤치에 올려놓은 사진기 위에 뽀얗게 내리 앉았습니다.
벌써 3시간여 운동장에서는 치열한 훈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때 아닌 여름 날씨지만 그들의 야구를 향한 열정은 오히려 태양을 녹일 듯합니다. 던지고, 치고, 몸을 날리고, 잡아내고, 놓치고, 또 던지고, 달리고, 받아내는 야구의 모든 기본을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뭔가 어색함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뭔가 구색이 안 맞는 듯한, 아무래도 빠진 것이 있는 듯한 그런 느낌. 아! 20여명의 아이들이 치열하게 벌이는 그 야구판이 너무 조용합니다. 가끔씩 작은 외침 비슷한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우리가 늘 봐왔고 당연하게 여기던 야구장에서의 선수들의 외침과 독려와 익숙한 소란함이 그곳에는 없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펼치는 야구 놀음은 아무래도 약간의 어색함과 함께 또 어떤 숙연함도 느끼게 합니다.

(농아인 국가대표의 연습 경기를 성심학교 야구부가 열심히 관전하고 있습니다.)

충주성심학교 야구팀 훈련장은 그렇게 늘 조용합니다.
잠시 쉬면서 검은 봉투에 잔뜩 담아온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을 때도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지만 청소년의 소란함이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없습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양손과 얼굴 표정과 보디랭귀지를 통한, 나름대로 왁자지껄하지만 귀가 아닌 눈으로의 소통이 있을 뿐입니다.

5월 들어 농아인 야구선수들에게 뜻 깊고 주목할 가치가 있는 대회가 계속 열립니다.
먼저 오는 5월 12, 13일 이틀간에 걸쳐 '제3회 아프로배 전국 농아인 야구대회'가 열립니다. 총 12개 팀이 출전해 A, B조로 나뉘어 12일 예선전을 벌인 후 13일에 준결승과 결승전을 치릅니다. 성심학교 야구팀도 출전하는데 B조에 속해 인하대 야구장에서 예선을 벌입니다. A조 예선은 송도 LNG 구장에서 열립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팀 중에 학교 팀은 충주성심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회인 팀입니다. 10년 전에 처음 창단된 성심학교 야구부 출신들이 대단히 많아 선후배의 대결이 펼져집니다.
예선을 통과한 4팀은 13일 LNG 구장에서 준결승과 결승전을 치르게 됩니다. 준결승 두 경기가 끝난 후에는 농아인 국가대표가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으로 구성된 챔피언스 야구단과의 친선 경기를 벌입니다. 부산, 서울, 청주, 전남, 충남, 대전, 인천, 경기 등에서 농아인 야구를 하고 있는 팀이 대거 출전하는 축제의 마당입니다.

(올해로 창단 10년째를 맡는 충주성심학교 야구팀은 12일부터 시작되는 전국 농아인 야구대회에 출전하는 유일한 학교팀입니다.)

유일하게 학교 팀으로 출전하는 성심학교 야구팀은 2002년 9월 9일에 창단됐습니다. 그때부터 야구부와 함께하고 있는 박정석 부장은 농아인 아이들이 야구를 하면서 얻게 되는 소중한 단체 생활의 경험과 자신감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합니다. 박부장은 "야구부원의 85%가 결손가정이나 장애자 부모를 둔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의 아이들이다. 가정 형편도 어렵고 자신도 장애다보니 늘 자신감이 없고 의지도 약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는 "일단 처음엔 야구를 두려워하고 의지가 약해 쉽게 포기하려 들기도 한다. 안타를 치면 자신감이 생길법도 한데 그것이 정말 더디고, 또 연패를 하면 좌절도 빠르다. 그러나 야구를 3,4년하고 졸업한 아이들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있다. 삶의 의지와 조금 더 나은 삶은 위한 도전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농아인 학교를 졸업하면 성적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거의 다 단순 노동직에 취직을 합니다. 그러나 야구부 출신 중에는 3,4년씩 일해서 돈을 모아 대학을 진학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학생도 있고 정말 어렵다는 농농통역사가 돼서 협회에서 일하는 선수 출신도 나왔습니다. 야구를 즐기면서 얻는 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와 자신감입니다.

(농아인 국가대표 청백전을 지켜보고 있는 박상수 감독과 이상훈 투수 코치)

이달 말에는 또 하나의 큰 농아인 야구 축제가 벌어집니다.
오는 26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에서 벌어지는 제7회 아시아태평양 농아인 경기대회에 사상 처음으로 야구가 시범 종목에 포함된 것입니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농아인 대표팀이 나서 일본, 대만과 자웅을 겨루게 됩니다.
총 14개 종목에 걸쳐 30개국에서 선수 및 임원단 2500명이 참가하는 스포츠 축제로 야구는 5월 30일과 6월 1일에 경기도 성남 탄천 종합운동장내 탄천야구장에서 벌어집니다. 5월 30일에는 오후 2시에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6월 1일에는 오전 10시 일본과 대만의 경기에 이어 오후 2시 한국과 대만의 경기가 열립니다.
20명의 선수로 구성된 농아인 국가대표는 박정석 부장이 단장이 맡았고, 10년째 성심학교 감독을 맡고 있는 박상수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아마 시절부터 프로를 거친 친한 친구인 전 LG 트윈스 투수 '야생마' 이상훈이 투수 코치를 맡고 있습니다.
이번 대표팀에는 충주 성심학교 재학생이 4명 포함돼 있고, 졸업생까지 하면 80%가 이 학교 출신입니다. 일부 뛰어난 선수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반대로 출전하지 못하면서 재학생들이 그 자리를 메웠습니다.

2003년 5월 봉황기 출전을 앞둔 성심학교 팀을 잠시 맡기로 했다가 10년째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박상수 감독은 "삶이 풍요로운 적이 없고 늘 받는 데만 익숙해진 아이들인데 야구부를 졸업한 선배들이 야구부 동문회를 만들고 매달 만원씩 내서 그 돈을 모아 후배들 간식비로 내놓는다. 그것만 봐도 아이들이 야구를 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스승의 날 야구부 졸업생에게 날아온 '야구부에서 배운 인사성, 시간 약속 등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돼 감사합니다.'는 문자를 보면 더 이상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뒤늦게 3,4년을 야구를 하게 된 것이 너무 좋았지만 또 너무 아쉬웠다. 빨리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어려서부터 야구를 시키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찡해지기도 합니다.

(제7회 아시아태평양 농아인 경기대회에 야구가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대한민국 대표도 출전해 일본, 대만과 자웅을 겨룹니다. 30일과 6월 1일 성남 탄천야구장에서 열립니다.)

수화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성심학교 야구팀을 맡아 낮에는 야구를 가르치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수화를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그간 겪었던 어려움이나 사연들을 꿰자면 책으로 몇 권을 써도 모자랄 지경. 수화에는 없던 야구의 용어와 규정 등을 선수들과 새로운 수화로 만들어가며 10년을 지켜왔습니다. 프로야구 선수를 비롯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장명희 콘솔시아 교장 수녀님의 헌신과 조일연 전 교감선생님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기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교장수녀님은 요즘도 아이들의 빨래를 직접 하시고 음식도 손수 만들어 먹일 때가 많습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귀가 멍멍하게 무엇도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잠시 그런 것이 아니라 평생이 그런 상태입니다. 감히 느껴보려고 해도 실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아인에게 야구는 특히 어렵고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이 날아가도 소리쳐 위험하다고 알릴 수 없고, 바로 곁에서 방망이를 휭휭 휘둘러도 들리지 않습니다. 시선이 빗겨 가면 외야의 선수에게 일일이 뛰어가서 의사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야구를 하면서 느끼는 희열과 감동과 또 좌절과 아픔은 귀가 잘 들리는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어쩜 더 큰 성취감이나 소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리는 자의 자만일 뿐 그들은 똑같은 야구선수입니다. 다만 더 힘겨운 과정을 거치고 이겨내며 야구를 하고 있을 뿐.
전국에 35만 명의 농아인이 있다고 합니다. 프로 야구 관중 700만에 사회인, 동호인 야구팀이 1만개를 육박하는 시대입니다. 농아인 야구팀도 갈수록 늘어날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주 성심학교 야구부를 만났을 때 프로 선수가 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4명인가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습니다. 예상보다 적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스스로 그런 생각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시렸습니다.
사실 농아인 프로야구 선수는 정말 힘든 도전입니다. 야구가 생활인 미국에서조차 2000년대 중반 커티스 프라이드 이후 MLB에 농아인 선수가 있다는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그러나 꿈이 있다는 것은 삶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프로야구에 농아인 선수가 나온다면 그것은 커다란 꿈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면 갈 길이 멀고도 멉니다.
박상수 감독은 말합니다, 실업야구처럼 오전에 업무를 보고 오후에 야구를 할 수 있는 농아인 실업팀이 만들어지는 것이 소망이라고.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농아인 프로선수가 탄생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뜻있는 기업에서 농아인 야구팀을 창단하게 된다면 많은 농아인 야구 선수들은 또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됩니다. 꿈을 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이의 꿈을 키워준다는 것처럼 뜻 깊고 소중한 일도 없습니다. 농아인 야구 선수들이 맘껏 꿈을 꿀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