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政敵)’이었던 대원군이 실각(1873년)한 직후 명성황후(1851~1895)가 오빠에게 보낸 한글 문안 편지 2통이 공개됐다. 을사늑약(1905년) 직후 자결한 민영환(閔泳煥)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민영환의 손자 병진씨가 27일 본지에 공개했다. 받는 사람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이 편지에 대해 병진씨는 “민승호(閔升鎬·1830~1874)에게 보낸 편지라고 집안에서는 이야기한다”고 밝혔다.
편지는 적색과 황색으로 된 청나라제 예쁜 색지(色紙)에 한글로 썼다. 꽃과 나비 그림에 ‘위천연우’(渭川煙雨·중국 시안에 흐르는 강인 위천의 안개와 비) ‘당호동원사어미몽헌(當湖東園寫於味夢軒·중국 저장성의 호수인 당호의 화가 ‘동원’이 미몽헌에서 그렸다)이라는 글을 곁들인 아름다운 편지지에서 당시 스물넷 한창나이였던 명성황후의 취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명성황후는 편치 않은 심신을 털어놓고 있다. 대원군의 그늘에서는 벗어났지만, 당시의 어수선한 국내외 정치 상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편지 모두 “(오빠의) 편지에서 밤 사이 탈이 없다 하니 다행이다. 주상과 동궁(훗날 순종)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니 좋지만,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다”고 적었다.
박재양 경희대 교수(국어학)는 “아주 잘 쓴 궁체(宮體)인데, 획의 돌림 등에서 날카롭고 꼼꼼한 성격이 엿보인다”고 밝혔다.
언제 쓴 편지일까. 날짜가 나와 있지 않지만, 두 통 모두 1874년 2월에 태어난 순종에 대해 언급했으며, 민승호는 1874년 11월 폭사(爆死)했기 때문에 편지는 그 해 쓴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의 편지는 현재 3~4점 정도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형준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hj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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